서문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몇 번의 큰 계기가 있는 것 같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비교적 평범한 나에 게는 1980년 서울의대에 입학하고, 1990년 내과전문의 취득 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연구하게 된 것, 2014년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한국여성과총)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내 인생에서 몇 가지 큰 사건이었다. 이 흐름에 나 자신을 맡기면서 학문적 성장을 했고 2010-2014년까지 대한 소화기기능성질환·운동학회에서 발간하는 「Journal of Neurogastroenterology and Motility」 국제학회지에 Deputy Editor로 봉사한 경험도 있어 그동안 발표한 논문을 정리하여 책을 발간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2015년 도서출판 대한의학과의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국 문 책을 발간한 후, 2016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었고, 2016년 Springer Co.에 서의 영문 『Helicobacter pylori』를 발간한 것은 의학자로 성장하는데 큰 경험이 되었다. 이제 2021년 도서출판 대한의학과의 국문 『소화기질환에서의 성차의학』 책을 발간하게 되어 아주 기쁜 마음이다. 보통 ‘성차의학’이라고 하면 일반인은 물론 소화기의사들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성(sex)을 연구하는 학문이냐고 질문을 하여 놀라게 했는데 Sex/Gender-Specific Medicine이라고 설명하면 “아! 그렇군요. 호모나 레즈비언 문제가 아니네요?”라는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편향성을 지양하는 의학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남녀 모두의 건강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성차의학’ 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계기는 2014년 한국여성과총 백희영 회장님과의 만남이었다. 2012 년 서울의대 여학생 졸업생들의 모임인 함춘여자의사회의 총무이사를 맡게 되면서, 2013년 한국 여자의사회 학술이사가 되었고 한국여자의사회 추천으로 2014년 한국여성과총 이사가 되면서 여 러 분야의 여성단체 대표들과의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후 2014년 8월의 더운 여름날 스탠포드대 학-한국여성과총간의 Gendered Innovation (GI) Workshop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스탠포드대학 Londa Schiebinger 석좌 교수님, 한국여성과총 백희영 회장님, 그리고 WISET Director 이혜숙 교수님 등 미국, 한국 교수들이 참여했고 숙명여대 성미경 교수님의 대장암 발표를 임상의학 측면 에서 도와드리면서 대장암의 성차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탠포드대학 채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백희영 교수님이 우리나라 의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김나영 교수가 성차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만큼 계속 잘 해주면 좋겠다는 말씀이 매우 낯설었던 기억이 선하다. 2016년 한국여성과 총 산하에 젠더혁신연구센터가 설립되었고 ‘젠더혁신을 통한 과학기술연구의 수월성 및 실용성 증 진’ 제목의 5년 연구과제에 참여하면서 식도, 위, 대장 질환에서 여성에 호발하는 ‘기능성 위장관장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2016년 한국연구재단의 중견연구자 신규과제 공모에서 ‘AOM/DSS 모델에서 대장염 및 대장암 발생의 성별 차이 및 에스트로겐에 의한 Nrf2 발현조절’ 제 목으로 연구비를 수혜받게 되면서 임상과 기초에 걸쳐 성차의학 연구를 균형있게 진행하게 되었다.
또한 3년 과제가 끝난 후 2019년 다시 한국연구재단의 중견연구자 신규과제 공모에서 ‘대장암 발생 과 진행에 있어 면역관문 및 Nrf2에 미치는 성호르몬의 영향’이 채택되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 를 할 수 있게 되어 더없이 기뻤다.
성차의학 연구에서 약간의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 즈음 의사 및 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성차교육 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젠더혁신연구센터에서 대학원 교육 과목 개발을 하면 어떠냐는 조언을 받아들여 2017, 2019년 서울의대 중개대학원에서 ‘의과학에서의 sex, gender 연구 (Sex and Gender Aspects in Biomedical Research)’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수업에 참가한 의 학자 및 의사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다만 성차는 확실한데 젠더 개념을 확실히 모르겠다는 여러 대학원생들의 피드백을 받아 더 깊은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성차의 학 대학원 수업 경험을 정리한 ‘Experiences with a graduate course on sex and gender medicine in Korea’ 논문을 2018년도 J Educ Eval Health Prof에 발표하면서 Londa Schiebinger 교수님을 비롯한 젠더혁신 연구자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 주된 이유는 성차교육 주제로 교육을 한다는 것이 젠더혁신에 앞서가고 있는 독일, 스웨덴, 미국, 캐나다에서는 당연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었다. 또한 2018년 4월 Utah 대학에서의 ‘Sex and Gender Health Education Summit’에의 참석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바쁜 소화기내과 의사 가 이런 학회에 가야 하는가 하는 내적 갈등도 있었고 여의도 벚꽃놀이로 인해 교통 체증이 심하여 공항 도착이 아슬아슬한데다가 새로 발급된 여권에 미국 비자 갱신이 되지 않아 결국 미국행 비행 기를 놓쳐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가까스로 포스터 세션에 도착한 그 날의 낭패감이 지금도 선하다. 이 학회에서는 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약사, 수의사 등 다양한 층이 참여하여 보건교육에 있어서의 성차교육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했고 성차교육 학과목 개발을 위해 학 장을 설득하기 위한 역할 놀이도 하는 적극성에 놀랐다. 특히 브라운대학 응급의학과 교수 두 명 이 응급실에 도착한 알코올 중독 환자 접근에 있어 남녀에 따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발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Utah 대학에서의 학회 경험에 자극을 받아 2018, 2019년 서울의대 본과 2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선택교과2에 ‘성차의학’ 강좌를 개설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2018년과 달리 2019년도에는 의대생들이 이 과목 선택을 많이 해준 것인데 그 이유는 최근 유행이 된 정밀의학(precision medicine)이나 맞춤요법(tailored therapy)에서 성차가 기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역시 의대생들은 미래의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 흐름을 감지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2016년 이후 5년간의 한국여성과총 주도의 ‘젠더혁신’ 사업은 모든 교수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비 공모와 학회지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한국연구재단의 젠더연구 RFP 제안 등 젠더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고 J Korean Med Sci 내지 Exp Mol Med를 비롯한 여러 유명 학회지 편집 위원회에서 논문에 sex를 밝혀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의 발표를 이끌어 냄으로써 과학 연구 진행과 논문 작성에 있어 성차가 중요하다는 학계의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 이처럼 한국여성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의 활동에 적극 참가한 덕분에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기초와 임상연구, 교육, 그리고 다학제 연구를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성차의학이란 결국 남녀에 있어서의 호르몬, 유전적, 환경적 차이가 질환으로 나타날 때 어떻게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학문으로 체계화되려면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아직도 실체가 잡히는 과거 완성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본 『소화기질환에서의 성차의학』 책 발간은 그동안 동료, 제자들과 발표한 연구결과를 정리하면서 흩어져 있던 지식을 체계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대한소화기학회 다양성위원회 위원장과 충북의대 학장을 역임한 소화기내과 박선미 교수는 10년 이상 동반자였고 대학원 교육이나 여성과총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소화기분야에 국한되어 정리된 이 책이 향후 여러 의학 분야에서의 성차의학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책 발간은 여러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할 수 있었다. 먼저 성차의학 연구에 있어 물심양 면으로 도움을 주신 한국여성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 백희영 센터장님과 2021년 1월 말 과학기술부 승인을 받은 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의 소장님이 되셔서 멋진 활동을 보여주실 이혜숙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을 펴낼 기회를 준 도서출판 대한의학 신은주 실장님과 그림과 테이블은 물론 책 발간에 중추적 역할을 한 김소현 선생님, 또한 바쁜 연구 와중에 원고 편집자 역할을 맡아준 박지현 연구원, 저마다의 전문지식을 좋은 원고로 만들어준 동료 저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1년 4월
대표저자 김 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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